내 무덤에서 울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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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사도10,34ㄱ.37ㄴ-43;사도 3, 1- 4;요한 20, 1- 9
내 무덤에서 울지 말아라.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 상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아드님 예수님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되살려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하느님의 크신은총입니까?
이렇게 크신 은총에 하느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다함께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알렐루야!
어젯밤 ‘부활 찬송’에서 노래하였듯이 하느님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어 그리스도를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온갖 죄악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하느님께 어찌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함께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Happy Easter!’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나 행복한 부활절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서로 축하의 인사를 주고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로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늘부터 팔일 동안 부활절 ‘부속가’를 다음과 같이 바칩니다.
“죽음 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다스리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하셨네.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 굳게 믿사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렇게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고 있는 우리가 주님처럼 죽음에서 부활하게 되었으니, 어찌 축하를 주고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면서 주님 부활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10여년 전에 부여를 방문했을 때, 무령왕(462-523)의 무덤을 탐방을 한 적이 있었는데, 왕릉 박물관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걸려 있었습니다.
“백제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순히 이승과의 작별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무령왕과 왕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가 누워있는 공간이 아니라 저승에서 태어날 시간을 기다리는 대기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령왕을 속으로 들어가보았더니, 살아있을 때의 왕궁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그렇다면 4세기 백제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유다인의 무덤은, 우리나라의 분묘와는 달리, 작은 언덕의 바위를 이용해 동굴처럼 만들고 관 없이 시신을 아마포에 싸서 안치한 후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전해 듣고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들어가 보았더니,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몸을 쌌던 아마포만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시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 수의를 무덤에 벗어 놓으셨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낙원에서 추방되기 전에는 낙원에서 알몸으로 생활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알몸으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역시 무덤에 사흘간 머물다가 수의를 벗고 알몸으로, 오직 나의 행실 만을 지닌 채 부활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마태25, 31-46)
이렇게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하여 곧 바로 생전에 행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 대가는 연옥에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천국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1-1022항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그럼,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나는 행복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후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참조)
따라서 후회없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영육간에 건강하고 행복하게 생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울고 있었지만, 나를 둘러쌓고 있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마냥 기뻐하며 웃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를 둘러쌓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슬퍼하며 울겠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웃으면서 하느님의 나라로 갈 것입니다.”
저는 부활절 아침에 1932년 미국의 시인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쓴, ‘내 무덤에서 울지 말아라’는 시를 읽고, 또 이 시에 곡을 붙인,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라는 노래를 듣는데, 이 노래 가사, 한번 묵상해보겠습니까?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 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의 별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나의 무덤 앞에 서 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죽었다고 생각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이 시는, 어느 어머니가 죽기 전에 딸에게 남긴 유언인데요, 그 어머니는 왜, 무덤 앞에서 울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어머니처럼 이 세상 떠나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들은 이미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여 따사로운 햇살, 하얀 눈, 반짝이는 별이 되고, 지저귀는 종달새,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저 높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처럼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생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생로병사, 희로애락, 특히 절망, 고독, 우울, 슬픔에 빠졌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에게 다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면서 주님 부활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2025.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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