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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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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찬일안드레아
댓글 0건 조회 166회 작성일 25-05-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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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여호 5,9ㄱㄴ.10-12;2코린 5,17-21; 루카15,1-3.11-32

 

,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것입니까?

 

   지난 주간에 산불로 인해 인명과 재산 피해 뿐만 아니라 산림이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습니까? 조속한수습과 복구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이런 재해가 재발 되지 않도록 산에서 지켜야 할 법규를 잘 준수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간에 어느덧 4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4월을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일락이 황무지에서 그 매서운 겨울을 견디어내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어 가냘픈 생명을 키워 꽃을 피우는데, 잔인할 만큼 큰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겨우내 고통을 극복하고 요즘 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듯이 우리의 삶도 곧 만개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정치 경제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가 곧 국난을 극복하고 더 좋은 사회로 꽃피울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을 잠시 바라다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것입니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이 저지른 죄, 그럼에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이에 상응하는 책벌을 온갖 명분과 핑계로 회피하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용서를 간청하시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함께 매달려있던 강도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강도처럼 불의한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겪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강도의 이 같은 청원,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믿음으로, 그 강도는 죽음의 날을 영원한 생명의 날로 바꿀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참회와 회개는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로 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작은 아들은 먼 고장에서 방탕한 생활하며 유산을 탕진한 후, 굶어 죽는 것을 피하려고, 아버지의 품팔이꾼이라도 되기를 기대하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가 먼발치에서 보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말합니다.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이렇게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아무런 질책 없이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고, 즐거운 잔치를 베풀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자비로운 아버지입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이 같은 자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아들은 굶주림을 채우려고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뿐인데,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저버렸던 아들로서의 품위, 존엄성을 되찾아 줍니다. 이런 처사, 과연 공정하고 정의롭습니까?


   왜냐하면 큰아들 생각처럼 상선벌악(賞善罰惡), 선을 행하는 사람은 상을 받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탕자가 범한 잘못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온데간데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 인과응보, 상선벌악을 포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한번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두 아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작은 아들은 강도처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 세리나 창녀처럼 죄인들이, 큰아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큰아들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상선벌악의 법칙을 적용하여 자기 형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형제나 친구로 받아들이시고 또 그들과 함께 생활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이렇게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우신 하느님의 자비입니까?


   이렇듯 상선벌악,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겠지만, 그 벌을 통하여 그 사람을 회개시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정의로 책벌하셨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로 구원하셨습니다.(‘공통 감사송’ 2참조)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루카6,36 참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고, 악인들에게 분노하고 그들을 비난하고 혐오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상선벌악은 하느님께 맡기고, 오히려 하느님처럼 가엾은 마음, 자비심을 갖고 악인들이 회개하여 의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종파주의, 같은 종파 사람끼리는 상호 간에 아량과 혜택을 베풀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집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지지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은 선이고 자기가 지지하지 않거나 자신의 의견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편은 혜택과 특혜를 주고 반대편은 차별하고 억압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이익과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 협력하여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이 먼저 혈연 공동체, 경제 공동체, 정당과 정파, 이런 낡은 편파성, 편파적 충성심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대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처럼 인종 국적 언어 문화 종교와 상관없이 온 인류를 포괄하는 보편적 형제애를 갖고 우리나라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2025.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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