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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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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왜, 그래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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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찬일안드레아
댓글 0건 조회 135회 작성일 25-05-1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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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1사무26,2.7-9.12-13.22-23;1코린15,45-49;루카6,27-38

 

  주님, , 그래야 합니까?

 

   오늘 성당에 처음으로 찾아오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성당에 오시기까지 자발적으로, 혹은 누군가의 권유로 입교하셨을 텐데요. 다른 한편, 오늘 여러분의 입교를 위해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이 참으로 많은 기도를 해왔고, 또한 하느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을 선택하셨음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여러분을 예비신자라고 부릅니다. 예비신자 여러분, 시작이 반입니다. 따라서 6개월간 교리 교육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입교한 예비신자들을 따뜻하게 환영해주시고, 비신자들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서 예비신자들이 우리처럼 세례를 받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구역반원들이 잘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어느 열심한 개신교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예배당에 갈 때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와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에 설교대 가까이에 위치한 V.I.P석에 앉아 예배에 참석해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집도 차도 처분해야 했고, 지하 월세 방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처지가 창피해 자매는 그 이후로 예배당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바깥 출입도 하지 않은 채 폐쇄적인 생활을 하게 되자 우울증에 빠져 점점 더 심신이 약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매가 우연히 책장에 꽂혀있는 성경 책을 발견하고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읽는데, 처음에는 집중도 되지 않고 한 장을 넘기는 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매일 조금씩 꾸준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요한 묵시록까지, 성경을 다 읽는데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 하지만 그 자매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와 건강을 찾게 되었고, 그 덕분인지 남편의 사업도 다 일어났고, 예배당에도 다시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뜻밖에 선사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많고 큽니까? 따라서 성경을 매일매일 조금씩 읽으면서 묵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면, 하느님의 선물, 은총을 선사 받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 동창 신부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어느 본당에서 성서 강의를 할 때 수강생들이 모두들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데, 유독 앞 자리에 앉은 한 중년의 형제가 강의하는 내내 창 밖만 쳐다보고 있어서 무척 분심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휴식 시간에 그 형제가 지팡이를 뚝뚝 거리면서 복도를 걷는 것을 보았는데, 시각 장애인인 그 형제가 창 밖만 쳐다본 것은 강의를 더 잘 들려고 강의하는 자신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는 불행하게도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실의를 극복하면서 시각 장애인들과 함께 봉사자가 읽어주는 성경 말씀을 듣고, 점자 성경책을 읽으면서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그럼, , 경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합니까?


   성경 안에서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과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성경은 교회에게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힘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헌장’ 21항 참조)


   그래서 우리가 성경 책을 꺼내 읽어보았지만, 그때마다 작심삼일이 될 만큼, 혼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우리 본당에는 그룹으로 일주일에 한번 만나 봉사자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 모임이 있는데, ‘가톨릭 성서 모임과 성서 못자리가 아닙니까?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3월초부터 성서 모임 그룹 원을 모집하고 있습니. 가입하셔서 보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시기 권유해 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지난 주일 복음이 뭐 였죠? 행복과 불행에 관해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어서 오늘 예수님께서 많은 교훈을 해주셨는, 어떤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주님, , 그래야 합니까?” 이런 있음직한 반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소유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소유물을 어떻게,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용도는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습니까?


   내가 의지하고 나를 지탱해주는 지팡이를 가지고 모세는 홍해를 가르는데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널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새를 잡는 장난감에 불과한 무릿매를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데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통일시켰습니다.


   몇 끼의 식사에 불과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기적을 행하는 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따라서 나의 소유물을 모세와 다윗,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원하는 데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 그래야 합니까? 주님!” 이런 반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런데 어떻습니까? 나를 괜스레 시기 질투하고, 이유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사울 임금은 충성스러운 신하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백성들이 다윗을 더 좋아하자 사울이 다윗을 시기 질투하지 않았습니까?(1사무18,6-9)


   그래서 다윗은 사울로부터 도망 피신하고, 사울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윗을 추격합니다. 어느 날 사울이 진지를 치고 잠들었을 때, 다윗은 그곳으로 다가갑니다. 그때 부하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찌르십시오.”


   그러나 다윗이 부하에게 뭐라 타일렀습니까? “사울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다윗은, 하느님을 의로움으로 누구에게나 되갚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사울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 후 사울은 필리스티나인들과의 전쟁에서 죽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지 않습니까?(2사무5,1-5)


   따라서 만일 사울처럼 나를 시기 질투하고, 그래서 나를 미워하고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처럼 그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여기고, 그 사람의 부당함과 나의 억울함에 대한 송사(訟事)는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뒤, 그 이웃이 호미를 빌리러 왔는데, 아버지는 호미를 챙겨주었습니다. 웃이 가고 난 후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나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똑같이 한다면 그것은 복수와 증오란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이 어떠 했든지 상관없이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것이 용서이자 사랑이란다.” (2025.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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