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하나 이다.
페이지 정보

본문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 2,42-47;1베드 1, 3- 9;요한 20,19-31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부활절, 잘 지내셨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안에 기득하시기를 다시 한번 더 기원을 드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10,39ㄱ-40)
그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을 언제 어디에서 만나셨습니까? 만나지 못했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이후에 사람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 저와 함께 묵상해보겠습니까?
주간 첫날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천사로부터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말씀을 듣고서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들에게 향해 다가 오셨습니다.(마태 28, 9 참조)
“평안하냐?”
또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옆에 서 계셨습니다.(요한 20, 14참조)
“여인아, 왜 우느냐?”
세 번째는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낙향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루카 24, 15참조)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네 번째로 토마스를 제외한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요한 20, 19 참조)
“평화가 너희와 함께!”
다섯 번째는 오늘 복음을 보면, 토마스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요한 20, 26 참조)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섯 번째는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아무것도 잡지 못할 때,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습니다.(요한 21,15참조)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일곱 번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마르 16, 14; 마태 28,18 참조)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밖에 또 누구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까? 사도 바오로의 증언에 의하면,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맨 마지막으로는 바오로 사도에게 나타나질 않으셨습니까? (1코린 15, 4-9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무덤, 길가, 다락방, 호숫가, 집회와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질 않으셨습니까?
따라서 무덤에서와 같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을 할 때, 우리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고통과 슬픔 속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처럼, 우리가 희망과 기대를 갖고 열심히 살았지만 학업과 취업, 사업 실패로 좌절과 절망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
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다락방에서와 같이,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 우울과 분노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티베리아스 호수에서처럼, 우리가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있지만 별 성과를 없는 듯 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서 음식을 나눌 때, 오늘처럼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계시는 만큼, 우리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예수님께 기도 드리면서 잘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사도’, 폴란드 성녀의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님(1905-1938)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느님 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죄과 벌을 완전히 용서를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이웃에게 하느님 자비를 말과 행동, 기도를 통해 자비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권고대로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면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가족과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되겠습니까?
물론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듯이 나에게 잘못한 가족과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나의 잘못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전제조건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따라서 내가 가족과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기도하면서 나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함으로써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반대로 가족과 이웃이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기도하면서 그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수치와 모욕, 상처, 그로 인한 분노와 미움을 때문에 잠을 설친다면 그 누가의 손해입니까? 용서는 누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나의 평화를 위해 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나의 용서가 없어서 가족과 이웃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런 괴로움을 예수님처럼 기도하면서 용서해주심으로 기쁨과 평화를 선사해주어야 하기 않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용서와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손등과 손바닥처럼 나의 마음을 바꿔 뒤집으면 보복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불끈 쥐고 있는 주먹 펼쳐서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족과 이웃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미움 속에서 해방되고 서로 화해함으로써 평화롭게 살 것인가, 아니면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증오와 보복 속에서 불안하게 살 것인가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2026. 4.12)
댓글목록

루치아노님의 댓글
루치아노 작성일다음주에독서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