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눈뜸
페이지 정보

본문
사순 제4주일
사무16, 1ㄱㄹㅁㅂ.6-7.10-13ㄴ;에페 5, 8-14;요한 9, 1-41
영적인 눈뜸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되고 있는 중동 분쟁, 얼마나 끔찍하고 비극적입니까?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5년이나 지속되고 있는데, 전쟁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하루 속히 종식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전구해 주시고, 폭탄의 포성이 멈추고 무기가 침묵하며, 모든 민족이 외교적 노력과 대화로서 화해와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어느 날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동안 시집살이를 몹시 모질게 해왔는데, 시어머니의 자리보전도 오롯이 며느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이리저리 눕히고 기저귀를 갈아 드리는 등 몸을 쓰며 돌보는 일,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딸이 돌봐 준다고 해도 자기 몸에 손도 못 대게 합니다. 자기 자식이 귀하니까 힘들고 지저분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며느리는 나중에서냐 알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딸에게 자신의 뒤처리를 시키지 않은 것은 귀한 딸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의탁하기에는 딸이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내밀한 곳을 의탁하기에는 딸보다는 며느리가 가깝고 임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나를 의탁한다는 것은 그저 아픈 몸만 맡기는 게 아니라 나의 가장 약한 순간을 보여주고, 나의 존엄을, 체면과 수치심까지도 맡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가깝고 임의로운 나의 가족이 가장 연약해진 그 순간에, 아픈 몸을 정성껏 돌보아주고 가족의 존엄과 체면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잘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봄에 대하여’, 박상경, 빛두레 제1730호 참조)
오늘 제1독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사이의 일곱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으로 다윗을 뽑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따라서 형제자매 여러분, 노약자와 환자를 대할 때에,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처럼 노약자와 환자의 속마음, 영혼과 존엄성을 보고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눈이 멀어 천대받고 버려진 사람의 고통을 보시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고통과 마주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눈먼 사람의 고통 앞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죄와 연결하려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 때문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때문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노화와 노환으로 내가 지금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장애를 겪고 있다면, 그 장애와 질병은 나의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노화와 노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드러나기 위해서 겪고 있는 삶의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먼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이르시자, 그 눈먼 사람들이 가서 눈을 씻고 앞을 보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께서 창세 때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장면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연민과 구원의 의지로 눈먼 사람의 눈을 단순히 뜨게 해주신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그 사람이 육신의 눈 뜸과 함께 영혼의 눈까지도 치유 받지 않았습니까?
박목월 시인의 개안(開眼), ‘눈을 뜸’이라는 시를 잠시 묵상해 보시겠습니까?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신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는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신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복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신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신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형제자매 여러분, 박목월 시인처럼, 하느님께서 지으신 오묘한 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라고 감탄할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한 황제였지만, “내 생애에 행복한 날은 6일 밖에 없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반면에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염으로 인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의 삼중고를 겪으면서도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생애에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삶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어떤 시각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천국이 되거나 지옥이 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하느님처럼 마음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뜸’, 이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신앙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우를 비추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나의 선입견과 편견과 불신에서 깨어나 일어나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선과 의로움과 진실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2026. 3.15)
- 이전글이리 나와라. 26.03.23
- 다음글나의 우물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26.03.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