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천당이 두 곳이 있습니다.
페이지 정보

본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지혜3,1-9; 로마8,31ㄴ-39; 루카 9,23-26
‘내게는 천당이 두 곳이 있습니다.’
오늘 스포츠 뉴스를 시청하는데, 미국 야구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오타니 선수가 홈런 52개, 도루 52번을 했는데, 이렇게 전세계 야구 역사에서 한해 동안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선수입니까? 또 연봉 7억달러, 매년 9천 2백억을 버는데, 그런 선수가 경기를 할 때 마다 마운드나 덕 아웃 주변에 떨어져 있는 휴지를 줍는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종종 목격한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오타니 선수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나는, 남이 무심코 버린 행운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남이 무심코 버린 쓰레기를 행운으로 여기고 줍고 있다니? 오타니 선수가 이런 정신을 갖고 선수 생활을 하고 있으니, 성공하지 않을 수 없겠고, 전 세계의 팬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를 경축하면서 순교자들의 신앙을 묵상해보고 순교 정신을 본받아 신앙 생활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어찌하여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천주교를 버리시오.”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천주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를 거부하오.”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 죽이겠소.”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회유와 모진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목을 베어 그 목을 감옥 대문 앞에 매달아 놓는’ 형벌을 받고, 스물 여섯에 순교한 성인은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아니십니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사제들의 대표 성인이고, 평신도들의 대표 성인은 성 정하상 바오로인데, 지금부터 정하상 성인의 생애를 잠시 묵상해보겠습니다.
정하상(1795-1839)은 여섯 살이 되던 해, 1801년 신유 박해로 부친 정약종이 순교하자, 모친 류소사와 두 살 어린 누이동생 정정혜와 함께 감옥에 갇힙니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재산을 몰수당해 유랑 생활을 하다가 유배 중이던 숙부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데, 친인척들로부터는 가문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면서 온갖 비난과 회유, 핍박을 당합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10대 후반이 되자 정하상은 함경도 무산에서 유배 중이던 조동섬을 찾아가 지내면서 큰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에 순교함으로써 조선에는 신부가 없었기에 성직자를 조선에 다시 입국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정하상은 조동섬의 친척 조숙의 집에 거주하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역관’(譯官),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의 종이 되어, 1816년 스물 한 살에 북경에 들어가지만 성직자 영입에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정하상은 포기하지 않고 역관 유진길과 함께 성직자 영입에 힘쓴 결과,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 1836년 프랑스인 피에르 모방 신부가 입국합니다. 사제들의 입국으로 신자들이 늘어나자 조선인 사제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선발하는데, 이들을 정하상은 국경까지 인도합니다.
이렇게 신유박해를 딛고 조선 천주교회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지만, 1839년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 ‘천주교를 퇴치한다’ 면서 기해박해가 재개됩니다. 박해가 시작되자 정하상은 앙베르 주교와 지방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서울로 올라와 ‘상재상서’(上宰相書), ‘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작성하고, 1839년 6월 모친 류소사와 누이동생 정정혜와 함께 체포됩니다.
감옥에 갇힌 정하상은 모진 고문을 당하는데, “넓적다리와 살갗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나가 뼈가 드러나고, 피는 용솟음쳐 땅으로 흘러 내렸지만, 그의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없었습니다.”
마침내 1839년 8월 14일 정하상은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에서 순교를 하는데, “형장으로 나갈 때 수레 위에 매달려 서서 흔쾌히 웃으며 즐거워할 따름이었다.”(정보록 일기)고 합니다. 그 때 정하상의 나이는 마흔 네 살이었습니다.
이렇게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천주교 신앙 때문에 집안이 몰락했음에도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주교 교리를 힘써 배워 익히고 그 교리를 전하고자 상재상서를 작성하였고, 조선에 성직자 영입과 신학생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순교하질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9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1백여년 동안 모진 박해를 받았고, 조선 교회를 위해서, 천주교 교리를 증거하다가 1만여명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순교자들은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과 불사의 희망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따르지 않았습니까?
이런 순교의 신앙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삶의 환난과 역경을 겪을 때,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의 편이 되시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나의 생로병사를 극복하고자 하질 않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매일 나의 이기심과 미움을 버리고 가족과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였을 때,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를 시복(諡福)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황일광 시몬(1757-1802)복자가 있습니다.
백정 출신 천민 황일광은 세례를 받고 처음 신자들 모임에 갔을 때,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던 양반들이 자신을 따듯이 환영해주고,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들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광경을 보고서 감격해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럼, 내게는 천당이 두 곳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천당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당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과 계급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여기고 서로 존중하였고, 특히 천민들, 사회적 약자들을 동등하게 대하면서 서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렇듯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우리 사회를 지상의 천당으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당에서 만나는, 낯선 교우에게 먼저 다가가 웃으며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 본당 공동체를 지상의 천당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2024. 9. 22)
- 이전글소화(小花)의 영성 25.05.17
- 다음글그래도 25.05.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