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마음의 해우소(解憂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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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예레 20, 7- 9; 로마 12, 1- 2;마태 16,21-27
웃음은 마음의 해우소(解憂所)
어느덧 내일이면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는데, 하느님 은총 안에서 늘 기쁘고 행복한 나날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병원 영안실에 시신 세 구가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모두 웃고 있었습니다. 부검관이 의아한 듯 경찰관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 시신들은 왜 웃으면서 죽었습니까?”
“아, 첫 번째 시신은 십 억짜리 복권에 당첨 되자 마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두 번째 시신은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일등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럼, 세번째 시신은 왜?” “아, 이 여자는 번개 불에 맞았다고 합니다.” “아니, 번개 불에 맞아 죽었는데, 웃긴 왜 웃었단 말이요?” 경찰관이 말했습니다. “번쩍 하고 터질 때, 누가 자기 사진을 찍는 줄 알고, ‘김치’ 하다가 죽었답니다.”
이렇게 웃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위에 누운 채 5분간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웃으면서 기쁘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그 할머니의 장수 비결입니다.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기뻐집니다.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저를 따라 한번 웃어 보시겠습니까? “하하하, 호호호, 희희희, 허허허, 해해해”
하하하(下下下)는 한자 아래 ‘하’(下) 자,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웃음의 출발입니다. 호호호(好好好)는 좋을 ‘호’(好) 자, 사이가 좋다는 것입니다. 웃음 속에 관계를 사이 좋고 아름답게 만듭니다.
희희희(喜喜喜), 기쁠 ‘희’(喜) 자, 희에는 좋은 ‘길’(吉)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웃다 보면 좋은 일만 생깁니다. 허허허(虛虛虛), 빌 ‘허’(虛) 자, 웃음은 ‘비움’입니다. 웃는 순간 마음에는 태평양보다 더 큰 바다가 생겨납니다.
해해해(解解解), 풀 ‘해’(解) 자, 웃다 보면 근심걱정이 도망갑니다. 웃음은 마음의 해우소(解憂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을 때는 하하하로 끝나면 안됩니다. 하하하, 호호호, 희희희, 허허허, 해해해로 마무리 되는 순간, 웃음이 완성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하였습니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보다 더 훌륭한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고,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 보다 더 큰 영광과 영예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이렇게 반박하지 않습니까?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나에게 걸림돌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반전입니까?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교회의 걸림돌이 되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수장이 사탄이 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한순간에 이렇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베드로의 이 같은 이중적인 신앙,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우리들의 의 생활 속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의 반석과 걸림돌, 성령과 악령이 나의 마음과 영혼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형제 자매 여러분,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바대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여 거짓이 아니라 정직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미움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선택해서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탐욕이 아니라 정의를 선택해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이렇게 토로하지 않았습니까?
“주님,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예레미아 예언자의 이런 토로처럼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놀림감이 되어 조롱만 받고,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자신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일, 자비와 정의를 중단 없이 실행하고자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럼, 내가 믿고 마르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1요한4,10 참조)
하느님의 이 같은 구원 계획에 따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시다가 사람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속량(贖良)하심으로써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된 만큼,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보다 더 자비롭고 의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해야 하겠습니다. (2026.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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